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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할 수 없는 환경, 정할 수 있는 의미-
그날은 조금 더웠다. 피었던 벚꽃은 비와 더위를 맞아 져버렸고, 주변 사람들은 미소를 잃고 있었다. 처음 보는 환경은 눈을 감았다 떠도 바뀌지 않았으며 매체로만 접했던 조교는 큰소리를 지르며 이것이 현실임을 자각하게 해주었다. 불안과 공포가 나를 물어뜯었고, 나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몇십 년 전 다른 곳의 그 날은 조금 추웠다. 사람들은 기차에서 내려 줄지어 서 있었으며 나치 군인들은 고성을 지르고 구타하며 뼈아픈 고통을 느끼게 해주었다. 엄격한 손가락 한 번으로 생과 사가 순식간에 결정되었다. 벗어날 수 없는 전기 울타리가 그들을 지키고 서 있었다. 몇십 년 전의 그곳은 나의 그 날보다 조금, 아니 훨씬 더 절망스러웠다.
나는 생각했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개인은 환경과 독립된 개체로 존재할 수 없다고 말이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시험 범위만 줄줄이 외우고, 내일 닥칠 시험만 생각하며 바닥을 보고 걸었다. 마찬가지로 군대에서는 낯선 환경에 위축된 된 상태로 그저 높은 사람들 눈에 나지 않기를, 그냥 오늘 급식이 맛있기를 빌며 옆 사람 발만 보며 걷게 된다고 생각했다.
이 책의 저자는 극심한 절망을 겪었다. 저자는 오랜 시간을 거쳐 연구한 원고를 비웃음당하며 빼앗겼다.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바친 삶을 부정당한 것이다. 기존의 학자로서의 내면이 부정당하고 숫자로 불리는 수감자의 생활을 시작했다. 수감생활은 처참했다. 먹는 것, 씻는 것, 자는 것 무엇 하나 좋은 환경이 제공되지 못했으며, 비위생적인 환경 속에서 고강도의 노동을 반복해야 했다. 옆의 동료들은 질병과 부상으로 인해 죽음의 문턱에서 신음하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연민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기존의 삶에서 이뤄온 모든 것들은 사라져 버렸다.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저자를 옥죄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지옥 같은 환경 속에서도 저자는 살아남았다. 많은 수감자는 육체적 죽음 이전에 정신적 죽음이 찾아왔다. 어떤 연민도, 동정심도, 공포도, 혐오감도 느끼지 못한 채 끝없는 그리움으로 그들 스스로를 남김없이 소진했다. 자신을 좀먹으며 감정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살아남은 것은 육체적인 생존 이전에 정신적인 생존이 선행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밝혔다. 그의 육체는 넝마가 되었을지언정 정신은 촛불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던 걸까?
인간은 분명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정신이 자유로울 수 있다. 이는 행동주의 심리학을 비롯해 많은 이론과 연구에서 증명한다. 나는 사람의 미래는 환경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으며 자유의지로 벗어날 수 없다는 물리학을 믿었다. 결정론적 허무주의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항상 그런 것일까? 저자는 다른 수감자들을 관찰하며 이렇게 서술했다. '수감자의 내면적 자아에 대한 책임은 외부 환경이나 심리적, 육체적 요인에 있지 않고 그의 자유의사에 따른 결정에 있다. 자신의 자아가 무너지는 것을 내버려 둔 사람들이 먼저 떠나갔다. 하지만 자
신의 정신을 지키기로 택한 사람은 죽을지언정 의미 없이 미리 자신을 스스로 떠나보내지는 않았다'라고 말이다. 나는 처음에는 저자가 다른 사람과 달리 초인적인 정신력을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처럼 절망 속에서도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은 저자 하나뿐이었을까? 극한의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자유의지를 잃지 않을 수 있다는 반례는 하나에 불과할까?
몇십 년 전, 나의 또래인 사람들은 행동, 말, 심지어 생각까지 통제되는 상황에서 그 무엇을 불사하고 독재정권을 끌어냈다. 그들은 기어코 자신의 피로 꽃을 피웠다.
그보다 더 이전, 포탄이 빗발치고, 옆의 전우는 쓰러져 가며, 매 순간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순간에도 국가를 위해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다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죽음은 하늘과 땅과 바다를 남겼다.
그보다 더 이전, 제국주의의 야욕이 한반도를 덮쳐, 민족의 빛이 꺼졌을 때도그 등불을 밝히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외침을 다시 들을 수는 없지만, 애국가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기에 기꺼이 그 삶을 바쳤는가?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자유를 빼앗겼지만, 자유를 빼앗기지 않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책을 빼앗긴 와중에도 떨어져 있는 종잇조각에 겪었던 일들을 적어나가며 자신을 기록해나갔다.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아내와 상상으로 소통하며 영적 자유를 간직했다. 그리고, 어떤 환경이더라도 인간의 정신적인 독립과 영적인 자유를 앗아갈 수 없다는 새로운 해답을 내놓았다. 다시 말해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그 무엇도 빼앗아 갈 수 없다. 극한 상황에서도 희생한 이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마음가짐은 어떤 과거도 어떤 미래에도 연연하지 않는 현재의 삶에서 온다. 현재의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빼앗을 수 없는 영혼의 자유라고 말이다.
또한, 저자는 완전한 절망 속에서도 더 고결한 가치를 추구할 수 있음을 말해주었다. 수용소같이 극한 상황에서는 본능에만 충실하고 이기적으로 다들 변할 것 같지만, 작가가 겪은 수용소 모습은 그렇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사람이 가진 신념과 특성을 더 드러나게 해주었다. 한 사람이 먹어도 모자랄 양의 빵을 타인에게 나눠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픈 동료의 짐을 대신 져주는 사람도 있었다. 이타성을 지니며 더 고결한 가치로 향하는 사람들은 그곳에서도 존재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공군의 역사도 그런 사람들을 비추어 준다.
고 심정민 소령은 죽음이 예정되어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자신을 희생하였다. 참전용사들 역시 그렇다. 자신의 삶에서 일궈낸 모든 것들이 전쟁으로 인해 사 그라들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절망 속에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로 자신의 삶에 의미를, 죽음에 헌신을 부여했다.
그들은 두렵지 않았을까. 물론 두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내일을 두려워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오늘을 살았을 뿐이다. 미래에 대한 공포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현재할 수 있는 제일 나은 선택을 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했다.
이 글을 쓴 저자 앞에서 그 무엇이 힘들다고 투정할 수 있겠는가. 그가 겪은 경험보다 내가 더 고통스러운가? 절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 절망의 끝에서도 우리는 삶에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미래를 볼 수 있으며 희망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책들보다 이 책이 더 큰 감동과 희망을 주었다. 정확히 말하면 희망을 얻은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피우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나는 입대 전에는 더 어두운 사람이었다. 입대 이전, 군대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미래를 불안하게 했으며, 군대와는 맞지 않을 것 같다는 과거의 기억에서 비롯된 추측이 나를 우울하게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적어도 어떤 상황이든 간에 과거에 대한 후회가, 미래에 대한 걱정이 생각보다 우리 삶을 망치지 않는다. 또한, 그러한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이 더 이상의 오늘을 망치게 둘 순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현재를 살지 않을 때 사람은 비참해진다. 영원히 침전하는 과거나 막연한 미래에 머물러 있지 말고 지금 찰나를 잘 살아 내는 것 만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바꿀 수 있다. 훈련소를 가고, 자대에서 일을 배우며 앞으로 더 절망스러운 상황이 일어날 것 같다는 막연한 불안이 나를 잠식했었다. 하지만 돌아 생각해보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실제로 걱정했던 그 미래가 아니라 그런 걱정을 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이 책에서는 말한다. 인생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이라고, 그 앞에 앉을 때마다 이제 곧 최악의 통증이 찾아오리라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있다고 말이다. 어느새 군인이 된 지 1년이 넘었다. 매사에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 선임병사분께 질문한 적이 있었다. 우리의 삶이 고통의 연속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예정이면, 우리는 살아갈 이유가 가 있냐고 말이다. 그러자 선임병사분은 우리의 미래는 가능성으로 차 있기에 고통의 연속이라고 장담할 수 없어 우리가 영원히 고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 것이라는 전제가 틀렸다고 대답하셨다.
그렇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오늘을 살아낼 수 있다고 하셨다. 그 대답을 계속 곱씹으며 내가 기존에 가졌던 정신적 의문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 대답안에 이 책 내용이, 이 책 내용이 그 대답 안에 있었다. 사실 이 책만으로 얻은 지식은 많지 않다. 다만 문자로 치환될 수 없는 진리를 새겨주었다.
우리가 깨달은 것은 활자로 표현할 수 있는 명시지'가 아니라 활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적인 '암묵지'가 더 크게 작용한다고 한다. 지금까지 내가 살았던 경험과 그에 따른 고민, 그리고 새로운 환경 속에서 얻은 통찰, 마지막으로 이 책이 전해준 지혜가 합쳐지며 나의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제 손톱을 물어뜯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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