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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그리스 신화들이 신들의 이야기였다면 일리아스와 오딋세이아는 신보다 인간 서사에 더 가깝다.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을 배경으로 그리스 군과 트로이 군의 공방전을 다룬다. 트로이의 목마나 파리스의 선택 등 오늘날까지도 모티브가 되는 장면이 많지만, 내가 생각하는 백미는 헥토르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일리아스가 인간 서사에 가깝다고는 했지만 신들의 개입에 따라 전쟁의 전황이 시시각각 달라진다. 아테나나 아레스 같은 신들이 직접적으로 전쟁에 개입해서 싸우며, 신과 비견되는 무력인 아킬레우스도 압도적인 무력으로 활약해 나간다. 이에 반해 헥토르는 그저 평범한 인간이다. 그는 국가와 가족을 위해 싸우는 인간적인 영웅으로, 단순히 전쟁과 명예만을 추구했던 아킬레우스와는 대조적이다.
헥토르는 전쟁터에서 용맹한 전사이면서도, 시민과 병사들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하는 책임감 있는 지도자이다. 동시에 그는 아내 안드로마케와 아들 아스튀아낙스를 깊이 사랑하며 가족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따듯한 아버지였다. 즉, 헥토르는 책임감, 가족애, 그리고 비극적 영웅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평범한 인간이기에 아킬레우스와 싸우면 진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헥토르는 자신의 운명이 죽음임을 알면서도 트로이를 지키기 위해 아킬레우스와 싸움을 선택한다. 지켜야 할것이 있기에, 전능한 능력이 없더라도 응당 자신의 자리에서 운명과 당당히 맞선다. 결국 그는 아킬레우스에게 패배하며 시체가 끌리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다. 압도적인 능력을 지닌 자들 앞에 범인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라는 거대한 물음은 헥토르를 통해 일리아스를 관통한다. 이는 용맹하지만 명예와는 거리가 먼 아킬레우스와 대립한다. 헥토르는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어떤 영웅이든, 어떤 신이든, 어떤 운명이든 그저 해야할 일을 해내는, 소시민적이면서 명예로운 인간상을 제시한다.
인간 중심 서사는 오딋세이아에서 이어진다.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오디세우스는 신에게 미움받아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떠돌게 된다. 그가 바다를 떠돌게 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포세이돈의 아들 폴뤼페모스의 눈을 찔러 멀게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꾀를 발휘하여 자신의 이름을 '아무것도 아니' 라고 소개하며 폴뤼페모스에게 잡히지 않지만 반대로 자신이 오디세우스라고 밝힘으로써 영영 바다를 떠돌게 된다. 즉 역설적으로 당당한 자기 선언이 위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러한 자기선언에 대한 탐구는 개인의 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이는 다른 서사 속에서도 나타나는데. 리어왕의 경우, 권력을 잃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며, 이는 그가 자신의 존재를 재정의해야 하는 상황을 초래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사고를 통해 존재의 확실성을 찾으려는 시도로,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이 드러난다. 제인 에어와 아이언맨, 타노스의 자기선언 역시 각기 다른 배경과 맥락 속에서 그들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드러낸다. 제인 에어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며, 아이언맨은 자신의 기술과 책임에 대한 선언을 통해 영웅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반면 타노스는 자신은 필연적이라며 자신의 신념에 따라 세상을 재구성하려는 극단적인 선언을 한다.
결국, 이러한 자기선언은 충분한 성찰 없이 이루어질 경우 오만과 약점으로 귀결된다. 성찰이 부족한 자기선언은 자신을 과대평가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위기는 더욱 심각해진다. 자기선언은 단순한 정체성의 표현이 아니라, 깊은 성찰과 고민을 동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딋세이아의 정체성이 들어나는데 이타케의 왕인 오딋세우스로 자기선언을 했을때는 무한한 고통의 굴레에 빠졌고, 반대로 그런 모든 정체성을 포기하였을때는 성공적으로 일이 잘 풀렸기 때문이다. 즉 이 이야기는 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고뇌이다.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과거의 나로 돌아갈지, 아니면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당장의 행복 속에서 살아갈지 말이다.
오디세우스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끝끝내 고향으로 돌아가 이타케의 왕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정체성에 관한 실수를 저질렀지만 그 실수까지도 인간의 정체성이기에, 의지를 가진다면 인간은 나아갈 수 있기에, 방황하는 자들이 모두 길을 잃은 것은 아니기에, 오딋세이아는 인간의 서사로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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