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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지탱하는데 있어 몇가지 의문을 매듭지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소설 파랑새에서는 파랑새라는 행복을 찾아 다른 모든 곳을 떠돌지만 결국 찾지 못한다. 그리고 파랑새는 바로 주인공 주위에 있던 것을 깨닫는다. 이런 이야기는 행복이 우리 곁에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하지만 이 책의 결말만 달라져도, 깨달음의 마지막 문장에 조금만 변용이 일어나도 내용은 아예 달라진다. 만약 파랑새를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면? 마지막 순간의 근처에서도 찾지 못했다면? 파랑새는 애초에 없던 것이라면? 나는 이런 의문들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집어 읽게 되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것을 판단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그 이외의 문제는 그 이후의 일이다.
진리는 우리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지 못한다. 책에서 나오듯이 갈릴레이는 재판장에서 사형에 처할 위기에 처하자 그가 평생 연구해 온 지동설을 번복했다. 딱히 과학적 진리가 삶을 버릴만한 가치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는 이유는 고상한 것이 아니다. 그저 짝짓기를 위해 지능이라는 불필요한 과시수단으로 이성을 유혹하기 위함이 본질이다. 오히려 진리는 추구할 수록 삶과는 멀어진다. 진리는 본질적으로 질서가 아닌 혼돈이다. 한때 모더니즘 사회에서는 인간의 이성이 모든걸 설명할 수 있다고, 우긴적도 있었으나 그 결과는 우생학의 실패, 양자역학, 불확정성의 원리로 산산히 조각났다. 애초에 진리가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면, 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던 원시인들을 안하던 자살을, 그렇게 많은것을 배운 우리가 기꺼이 더 많이 생각하겠는가?
행복도 우리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지 못한다. 친구, 가족, 취미 같은 가치는 모두 행복으로 치환할 수 있다. 그것들이 그 자체로 본질적인 가치를 지니는게 아니다. 행복을 가져다 주기에 삶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가족과 절연하다면, 연인과 헤어지게 된다면 더이상 그 사람들은 우리의 삶에 중대한 의미를 가져다 주지 못한다. 더 이상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을 느낄 수 없다면, 호르몬의 문제나 정신적 질환, 사회 환경의 변화 등으로 그렇게 된다면, 행복의 상실은 곧 삶의 가치의 상실로 이어진다.
눈사람 살인사건의 말처럼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이러한 부조리를 극복하는 방법중 하나는 신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상에 신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힘든일을 겪을때에는 신이 준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가끔 찾아오는 행복은 신의 보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우리가 해온 선행이 먼 미래에 보답을 받는다고 믿는 것이다. 아무런 의도가 없는 세상속에 초월적인 의도를 부여한다. 삶의 행동에 먼 미래의 행복을 위한 희생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짓을 믿을 수는 없다. 애초에 카뮈가 처음 던진 질문 자체가 신이 죽은 이후에 나온 사회상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만들어진 신'을 읽었다. 알 밖의 세계를 본 현대인들은 다시 신 이라는 알로 돌아갈 수 없다. 신이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임을 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의 의미가 없으니 자살을 긍정해야 할까?
사고실험을 해보자. 만약 누군가 내 머리에 총을 겨눈다거나 화재로. 목숨이 위협받는 사고현장에 내가 있다. 그렇다면 살기 위해 시키는 대로 하며, 화재 현장에서 뛰어나온다. 방금 전까지 삶에 의미가 없다고 했더라도, 막상 죽음이 강요되면 그 강요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쓸것이다.
이런 사고실험은 삶의 의지가 본능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카뮈가 말한 부조리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삶은 본질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도 끊임없이 살고자 한다. 죽음의 문턱에서조차 삶을 붙잡으려는 의지. 그것이 생명체의 본능이며, 인간의 조건이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한 해답으로 '반항'을 제시한다. 신으로 도피하지 않고, 자살로 도망치지도 않으며, 부조리한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 시지프는 끝없이 반복되는 무의미한 노동 속에서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운명에 반항하며 살아간다. 그는 바위를 산 정상까지 밀어 올리는 순간의 투쟁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즉 그 순간에 충실히 살아가는 태도다.
이것은 단순히 체념이나 수동적 수용이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인 태도로 부조리를 직시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을 창조해 나가는 것이다. 카뮈는 "시지프를 행복한 사람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시지프가 자신의 운명을 알고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삶의 의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행복이 삶의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진리가 삶의 가치를 보장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삶을 지탱해야 할까? 카뮈는 그 답을 우리 스스로의 선택과 행동에서 찾으라고 말한다. 부조리를 직면하고도 삶을 선택하는 것, 그리고 그 삶 속에서 나만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 이는 단순한 낙관주의가 아니라, 삶에 대한 깊은 반항과 의지의 표현이다.
결국 삶의 가치는 우리가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다. 파랑새를 찾지 못했더라도, 심지어 파랑새가 애초에 없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도 계속 살아갈 수 있다. 시지프처럼, 반복되는 무의미한 하루하루 속에서도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위대함이 아닐까.
카뮈의 시지프 신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삶은 부조리하고, 의미는 없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부조리를 직면하면서도 삶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시지프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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